숙소에 짐 풀고 화엄사를 갔다. 화엄사를 둘러 보면서 둘러 가보니 맑은 계곡이 숨어 있었다. 예정도 없었고 따로 챙겨간 것도 없었지만 한달 묵은 더위를 다 씻어내고 왔다. 예전부터 탐이 났던 동생 카메라의 파노라마 기능을 여러 번 실험해 봤지만 역부족이다. 밑에 내려와서 내일을 위한 만찬을 즐겼다. 만족스러웠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맘먹으면 내가 더 잘할 것 같다.

새벽에 일어나서 토스트 두 장과 계란 두 개씩을 먹고 출발! 성심재 가는 버스엔 생각 외로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거다. 오랜만에 배낭을 메서 그런지 마냥 설레면서 걸었다. 전라도 아저씨들은 참 말이 많다. 어지간하면 들어주면서 가겠는데 쉬지를 않는다. 일부러 떨어져서 걷다가 쉬는 길에 다시 마주쳤을 때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다. 별 말없이 별 생각 없이 걷는 건 참 좋은 것 같다. 가기 전엔 나를 되돌아 본다느니 어쩌느니 하지만 여행에 좋은 점은 꽉 차있는 머리 속을 비우고 좋은 경치와 맑은 공기(거기에 새로운 만남을 더하면 훨씬 좋겠지만)로 채우고 오는 거지 싶다.

가는 길엔 이름 모를 야생 꽃들이 그리고 곳곳에 나비가 많다. 비만 아니었으면 카메라 계속 들고 더 찍었을 텐데 아쉽다. 그러고 보면 여기 알록달록한 풀과 꽃들은 논 밭에선 다 잡초로 취급 받겠지 싶다.

처음엔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과 흐린 날이 축복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폭우로 변해간다. 양말, 수건, 옷, 모자, 장갑, 신발 할 거 없이 땀과 물이 분간 안될 정도로 젖어간다. 배낭은 방수 커버 덕을 톡톡히 봤다. 어찌 보면 엄청 찝찝하고 더러울 수도 있겠지만 종일 매연과 에어컨 가스만 들이마시는 것에 비해 이렇게 종일 땀 흘리고 산과 숲이 빚어내는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큼 좋은 정화는 없는 것 같다.

올라가는 길에 간식으로 대추 토마토와 양갱을 먹었다. 설국열차를 안 봐서 맛나게 먹었다. 산에선 초코바 보다 양갱이 맛나다. 일곱 시간 남짓 걸어서 산장에 도착했다. 집에서 몇 번 간이 버너 키는 연습을 했지만 쉽지 않다. 물론 옆에 아저씨가 도와준다. 세 개 먹을까 네 개 먹을까 고민 끝에 하나는 다음날 아침에 라면 죽 끓여서 먹기로 하고 두 번에 나눠 끓였다. 풋고추와 다시마를 더 챙겨 넣은 덕에 느끼함을 덜었고 가져간 김치와 메실 장아찌도 절묘한 조합을 이뤘다. 저녁 메뉴 구상은 이랬다. 미역 된장국에 햄 볶음과 밑반찬, 그리고 미니 소주를 별과 함께 마시는 상상이었지만 실현 되지 않았다. 라면 죽에 참치를 곁들이는 상상도 붕괴했다.

점심 먹고 대피소 처마 틈에 자리잡고 쉬었다. 치약을 쓰면 안된다고 해서 피로회복용 죽염으로 양치질을 했다. 역시 난 천잰 것 같다. 추워서 옷을 더 꺼내 입고 갈까 말까 하는데 지리산 호우주의보로 하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기념사진을 한방 찍고 하산했다.

빨라 보이는 길로 내려갔는데 길이 너무 험했다. 거의 수직 낙하 코스라 발이 아니라 팔과 엉덩이로 기어 내려갔다. 이러면 안되는 걸 알면서도 내 목숨이 위태위태 하다고 느껴 챙겨온 쌀을 뿌려 버리고 말았다.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고 내려왔더니 완만한 길이 나왔다. 음정마을까지 4키로 정도 되는 길인데 옆으로 비경이 펼쳐졌다. 백두대간의 시작점인 지리산 자락에서부터 굽이 굽이 이어진 산 사이로 구름이 서려있다. 이렇게 산들이 얼기설기 모여서 구름 위로 배추도사 무도사가 산 넘어를 통통 튀어 다니겠구나 싶다. 며칠 전 책에서 본 백두대간 탐방도 매력있겠다.

산길을 벗어나니 바로 택시를 만났다. 발과 무릎에 무리가 왔지만 택시의 유혹을 뿌리쳤다. 국어선생님이 한 명씩 일어나서 불러보라고 했던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것 같은 넓은 벌과 실개천, 산과 구름이 어우러진 산골마을 음정에 도착했다.

빨간 우체통 옆에서 서울 마실가는 시골 총각 컨셉의 사진을 찍고 함평으로 가서 서울행 버스를 타고 올라왔다. 본의 아니게 일박이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엄청 좋았다. 거기다 웬만한 장비도 다 갖추게 됐고 어지간한 짐 메고도 충분한 산행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Lv. +2)

덧붙여서 총 비용은 교통비 5만 원, 숙박비 2만 원 등 계속 쓸 장비 값을 제하면 십만 원 내외. 예정대로 종주를 했어도 십오만 원을 넘지 않았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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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or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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