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생각해왔던 장기여행을 또 한 번 나서게 되었다. 이번에는 여편님과 함께, 우선 5개월 정도 아시아를 여행할 생각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6월 말에는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처음에는 한국에서 출발해서 동남아-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일정을 생각했다. 하지만 동남아와 아시아에 대해 알아갈수록 가고 싶은 곳도 많아지고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기세론 중앙아시아까지나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거실에 대문짝만하게 붙여놓은 세계지도를 보며 틈틈이 토론한 끝에 베트남-캄보디아-태국-미얀마-스리랑카-네팔 정도로 경로르 구상한 상태다.
항공권과 집
나의 퇴사 일자가 확정되고 난 뒤, 12월 중순 쯤 얕은 고민 끝에 끊은 인천-다낭(베트남) 편도 항공권을 구매했다. 늘 타고 다니는 제주항공이 신규 취항 기념으로 특가를 많이 하고 있어서 1인 당 15만 원 선에서 구매가 가능했다. 편도항공권 구매시 입국 거부 등의 위험으로 귀국 항공권이 필요하다는 주의사항이 있었다. 이걸 방지하려고 추후에 이동할 지역의 항공권을 구입하려고 보니 벌써부터 구체적인 일정을 짜는게 못마땅했다. 미루고 미루다 대충 방콕에서 돌아오는 항공권을 구입해서 e-티켓만 출력 후 다시 환불해 버렸다.
여행 기간 가장 중요한 이슈는 빈 집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다행히 결혼 전 동거인이었던 동생이 다시 집에 들어오는 걸로 해결이 되었다. 동생의 이사도 돕고, 우리와 진한 인사도 나눌겸 제주도의 부모님이 올라오셔서 퇴사하자마자 정신없는 며칠을 보냈고, 약 2주 간 동생의 출근 준비를 돕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건강과 보험
장기간 여행하면서 가장 유의해야할 것은 첫째도, 둘째도 건강이다. 무사히만 돌아온다면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그래서 준비하는 것이 예방접종과 보험이다. 예방접종은 다들 그렇듯이 국립중앙의료원에 신청해서 주사를 맞았다. 난 황열병과 파상풍 주사의 유효기간이 남아서 장티푸스 주사만 한 방 맞았고, 여편님은 3가지 주사를 한 번에 다 맞았다. 결과적으로 둘 다 4,5일은 접종 후유증으로 골골 거리며 험난한 준비기간을 보냈다.
그리고 가장 많이 알아본 것은 여행자 보험이었다. 대충 책이나 인터넷을 보면 많은 장기 여행자들이 어시스트 카드라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보험 패키지를 신청한다. 이걸 하느냐 다른 대안을 찾느냐를 놓고 꽤나 고심을 했다. 와중에 보험 관련 일을 시작한 동생의 조언을 구하다보니 비용 대비 보장액이 적절한 상품을 찾고자 노력을 했다. 이래저래 알아본 결과 상대적으로 보험료가 저렴한 단기 여행자 보험을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주요 보험사 중 1군데 정도가 장기 여행자가 장기 체류 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다. 1년을 기준으로 대략 70만원의 비용이 발생했다. 이걸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엄청난 고민을 했다. 단기 상품만 가입했다가 다시 해지해서 또 고민하기도 했다. 난 보험에 대해 비판적이라 보험 상품 하나 들어본 적도 없고, 예전 장기여행 때도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제 홀몸도 아니고, 혹시나가 가져올 여파가 책임질 것이 없던 시절과는 다른 것 같아 두 눈 꼭 감고 가입했다.
돈돈돈
여행할 때 가장 많이 필요한 것은 돈이다. 건강이고, 언어고, 지식이고, 용기고 부족한 것은 돈으로 다 커버할 수 있다. 물론 건강하고, 아는 게 많고, 말이 통하고, 용기가 있으면 돈이 좀 덜 들기도 한다. 어찌됐든 이 돈을 잘 관리하려니 통장도 두 개 더 만들고, 해외에서 수수료나 이용이 편리하다는 시티은행 체크카드와 하나은행 체크카드를 준비했다. 약 8년 간 지속적으로 말아먹기만 하던 100만원 남짓한 펀드를 이제야 회수하고, 3년 간 부었던 채권 펀드도 해지해버렸다. 미약한 나의 퇴직금은 수소문 끝에 영업일 기준 출발 전날에서야 거머쥘 수 있었다. 그리고 5년 만의 최고 환율이라는 연초 고환율 러쉬에 충격을 받고 매매 타이밍을 재고 재다가 이것도 끝내 막판에 가서 최고 정점에서 1000달러를 매수해야 했다.
남들 다 죽어라 일하는 이 마당에 또 여행이나 가겠다고 하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듣는 소리가 금수저론이다. 물론 이걸 아예 부정할 생각은 없다. 금수저까진 아니어도 부양해야할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살던 집을 마련하는 데에도 부모님으로부터 막대한 도움을 받았으니 최소 동수저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애시당초 여행이나 가려던 생각으로 3년 간 쓸데없는 소비 줄이고, 비싼 옷 안사고, 부지런히 밥 해먹으며 모은 덕도 크다. 더불어 결혼식도 검소하게 치뤘고, 혼수도 이불과 밥솥 외에 큰 돈을 들이지 않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수 년간 죽어라 일한 여편님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전자제품
최첨단 디지털 강국의 여행자로서 챙겨야할 전자제품이 많았다. 여편님이 사용하고 있는 맥북을 들고 가자니 인터넷 뱅킹 등의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고심 끝에 보조노트북으로 쓸겸 집에 있는 구형 노트북도 같이 들고가게 되었다. 카메라는 최근 중고 거래에 맛들인 우리답게 소니의 미러리스 nex-5t를 중고로 샀다. 막상 집에 와서 보니 잔 기스도 많고, 덮개도 없어서 판매자를 저주했지만 이런 저런 보조 용품을 사고 청소도 좀 해줬더니 나름 애정이 생겼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휴대용 태양광 발전기다. 오지를 촬영하는 사진가들이 카메라 밧데리 충전을 위해 이런 걸 들고다니는 얘기를 듣고 순간 모험심이 발동했다. 가능한 친환경 여행을 하고 싶다는 나의 의지와도 맞물려 수소문 끝에 휴대용 발전기를 하나 챙겨왔다. 이게 하필 아이폰은 충전이 바로 안되서 덩달아 샤오미 베터리도 하나 챙겨왔다. 그 외에 외장하드, 변환 어뎁터, 멀티 콘센트 등 챙기다 보니 전자제품 덩어리만 해도 한 짐이 되었다.
기타 물품
둘 다 큰 배낭은 예전에 사둔 것이 있어서 그걸 쓰기로 했고, 준비하다보니 주로 있는 것을 위주로 쓰고, 필요한 몇몇가지만 사기로 했다. 보조배낭이나 침낭은 예전에 쓰던 게 아직 쓸만 했고, 여편님은 가벼운 침낭을 하나 주문했다. 그외 여행용 쿠션이나 스포츠 타올 등 이것저것 사다보니 이것도 10만원을 훌쩍 넘겼다. 비상약을 챙기려다 보니 서로 노선이 갈렸다. 나는 외상의 아픔이 있어 붕대, 소독약, 밴드 등을 넣었고, 여편님은 벌레 방지와 치료 물품에 전념했다. 결국 약봉지도 크게 부풀었다.
또 하나 작은 소동이 있었던 것은 화장품과 세면도구다. 남자인 내 입장에서 보기엔 저런 무겁고 다양한 것들을 뭣하러 들고가냐고 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동생의 지지 발언에 묻혀 여편님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대신 관련 물품은 여편님이 들기로 했다.
옷은 어차피 더운 지역이 태반이고, 필요하면 사면 된다는 주의라 출발 전날에 대충 두깨별로 몇벌 챙겼다. 트레킹 등을 위해 등산화를 사려고 아울렛까지 간 적이 있었지만 이것도 귀찮음을 반반하여 평소 신던 등산화를 신고 가기로 했다. 거기에 각자 조리와 크록스 하나 씩 챙겨와서 신고 있다.
출발 당일
건강보험료 납입 중지를 당일에야 신청하려고 보니 아직 퇴사처리가 안되서 퇴사 처리가 되고 나서야 신청이 가능하단다. 결국 동생에게 사후 처리를 위한 메모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처가에 들러 맛난 아주 맛난 밥을 얻어 먹고 형님과 아버님이 친히 우리를 데리고 인천공항으로 가셨다.
얼른 수속을 끝내고 여유롭게 면세점 구경이나 하려던 참인데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항공사에서 귀국 티켓이 불분명하면 수속을 안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다소간의 빡침과 당황으로 어버버하는 사이 여편님이 침착하게 등장해서 사태를 수습했다. 우선 방콕발 티켓을 끊어서 수속을 마치고, 환불 한 뒤 혹시 모를 베트남에서의 입국 거부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다낭에서 돌아오는 항공권을 구입했다. 겨우 수속 마감 시각에 맞춰서 티켓을 받고, 민망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형님, 아버님과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떨떠름하고 넋이 나간 상태에서 비행기에 타고 꾸역꾸역 졸며 다낭에 도착했다. 다행히 베트남 입국 절차는 간단했지만 픽업을 위해 나오기로한 숙소 측 피켓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 반 침착 반으로 서성거리다 혹시 몰라 잡히는 와이파이에 메일을 열어보니 담당자가 아파서 못 온다는 메일이 와있었다.
현지 시간으로 새벽 1시라 마음이 좀 찝집했지만, 별 수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다낭(da nang)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호이안(hoi an)으로 향했다. 택시기사가 길을 헤메긴 했지만 어찌저찌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준비소감
본격적인 준비 기간은 퇴사 후 2주 정도였는데 준비하랴 사람 만나랴, 퇴사자 감성팔이 하랴, 다소 지치기도 했다. 그래도 짧게 나마 얼굴 보러 와준 사람들이 지금 생각하니 매우 고맙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닌 것들로 고심하느라 마음이 급해졌었다. 그러다 보니 책도 별로 못보고 사람도 많이 못 만났다. 이 기간에 만난 한 분이 이렇게 여행을 떠나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딱 두가지라 하셨다. “사랑”과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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